
감독 : 폴 토머스 앤더슨
개봉 : 2025년
장르 : 액션 · 코미디 · 드라마
러닝타임 : 162분
출연 :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숀 펜 · 베니치오 델 토로 · 테야나 테일러 · 체이스 인피니티
개인 평점 : ★★★★★
🚨 이 글에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아직 보지 않았다면 참고해 주세요.
영화《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2026년 주요 영화 시상식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은 화제작이다. 골든글로브 4관왕과 BAFTA 6관왕에 이어 제9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 등을 포함해 6관왕을 차지하며 작품성과 연출력을 모두 인정받았다. 특히 폴 토머스 앤더슨은 감독상을, 숀 펜은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영화의 완성도를 다시 한번 입증했다.
✦ 혁명가였던 남자, 딸을 지키는 아버지가 되다
영화의 시작은 평범하지 않다. 과거 급진적인 저항 조직 ‘프렌치 75’가 이민자 구금 시설을 습격해 사람들을 풀어주고, 그 중심에는 거침없는 혁명가 퍼피디아 베벌리 힐스가 있었다. 밥 퍼거슨은 그녀와 함께 움직이는 동료이자 연인이다.
퍼피디아와 밥은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삶에 군인 스티븐 J. 로크조가 끼어들면서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로크조는 퍼피디아에게 강하게 집착하고, 그 집착은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을 넘어 통제와 지배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흐른 뒤 밥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 과거의 혁명가는 사라지고, 약물에 의존하며 불안에 시달리는 남자가 되어 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끝까지 놓지 않는다. 바로 딸 윌라이다.
이 변화가 영화에서 중요하다. 밥은 더 이상 세상을 구하려는 영웅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삶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사람에 가깝다.
그런데 딸이 위험에 처하는 순간, 그는 다시 움직인다. 결국 밥에게 남은 마지막 혁명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딸을 지키는 일이다.

✦ 로크조가 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지배이다
영화에서 가장 기묘하면서도 중요한 인물은 숀 펜이 연기한 로크조다. 그는 겉으로는 군인답게 질서와 권위를 강조하지만, 실제 행동을 움직이는 것은 극단적인 집착과 열등감이다.
퍼피디아에게 모욕을 당했던 순간부터 그는 그녀를 잊지 못한다. 문제는 그 감정이 사랑의 형태로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퍼피디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만들고 소유하는 것이다.
더 아이러니한 것은 로크조가 인종적 우월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자신이 경멸하는 대상에게 욕망을 느끼고, 그 모순을 인정하지 못한 채 오히려 더욱 강한 권력과 폭력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래서 로크조는 단순히 악한 악당이라기보다 영화가 보여주는 권력의 모습을 상징한다. 자신의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타인을 통제하려 하고, 통제가 되지 않을 때 폭력을 선택한다.

✦ 딸을 쫓는 자, 딸을 지키려는 자
영화가 중반으로 넘어가면서 이야기는 윌라에게 집중된다. 윌라가 과거 혁명가인 밥과 퍼피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는 사실과 관련된 과거가 로크조의 집착과 연결되어 있고, 그는 윌라의 존재를 통해 과거의 관계와 자신의 욕망을 다시 붙잡으려 한다.
로크조가 윌라를 쫓기 시작하면서 밥 역시 과거에서 도망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영화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흥미롭게 뒤집는다. 과거에는 밥과 퍼피디아가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웠다면, 이제 밥은 딸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윌라는 단순히 보호받기만 하는 딸이 아니다. 자신만의 판단과 행동력을 가진 인물이다. 밥이 과거의 혁명가였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윌라가 어떤 사람으로 성장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액션은 단순한 추격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밥은 딸을 구하기 위해 과거의 동료들을 찾아가고, 과거에 사용했던 연락망과 암호를 다시 떠올려야 한다. 그런데 한때 거대한 혁명을 꿈꾸던 남자가 이제는 암호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이 장면들이 웃긴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밥은 영웅처럼 돌아온 것이 아니다. 지치고 망가진 중년 남자가 딸 때문에 다시 움직이는 것이다.

✦ 웃기면서도 이상하게 긴장되는 이유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독특한 것은 무거운 이야기를 무겁게만 다루지 않는다는 데 있다. 추격과 총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밥의 허술한 행동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심각해야 할 순간에 엉뚱한 인물이 등장해 분위기를 비튼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연기한 센세이 세르히오 역시 그런 영화의 유머를 담당하면서 동시에 밥과 윌라를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렇다고 액션의 긴장감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감독인 폴 토머스 앤더슨은 장면의 속도를 계속 바꾸면서 관객을 끌고 간다. 빠르게 질주하는 추격 장면 뒤에 느슨한 대화를 붙이고, 웃긴 장면 뒤에는 갑자기 폭력적인 상황을 배치한다.
그래서 162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에도 영화가 쉽게 늘어진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액션영화의 속도감과 블랙코미디의 엉뚱함, 정치적 풍자를 한꺼번에 밀어붙이는 방식이다.
✦ 결국 제목이 말하는 것은 ‘싸움의 반복’이다
영화 제목인 ‘One Battle After Another’는 말 그대로 하나의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이 이어진다는 뜻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계속 싸운다. 혁명가들은 억압에 맞서고, 로크조는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싸우며, 밥은 딸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운다.

하지만 영화가 마지막에 보여주는 싸움은 처음과 조금 다르다. 젊은 시절 밥에게 혁명은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거대한 이념은 흐려지고, 남은 것은 윌라와의 관계다. 세상을 바꾸겠다고 뛰어들었던 남자가 이제는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핵심은 ‘혁명이 성공했는가’가 아니다. 싸움이 계속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나는가에 가깝다.
밥은 완벽한 아버지도, 위대한 혁명가도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다. 그럼에도 윌라를 향한 사랑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는다. 영화가 밥을 완전히 비웃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폴 토머스 앤더슨은 거대한 정치적 이야기를 결국 한 가족의 이야기로 좁혀온다. 혁명과 권력, 인종주의와 억압이라는 거대한 문제가 등장하지만 영화의 감정적인 중심에는 결국 아버지와 딸이 있다.
그리고 그 관계를 통해 아주 단순한 답을 내놓는다. 싸움은 끝나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이 쉽게 바뀌지도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다시 일어나는 일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는 거대한 혁명에 대한 영화처럼 시작하지만, 마지막에는 결국 사랑 때문에 다시 싸우게 된 한 남자의 이야기로 남는다.
아카데미 6관왕이라는 결과만으로 이 영화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왜 그렇게 많은 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는 영화를 보고 나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빠른 액션과 유머, 묵직한 이야기까지 한꺼번에 담아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아직 보지 않았다면 한 번쯤 직접 확인해 볼 만한 작품이다.
"세상을 바꾸려 했던 혁명가가 결국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우게 되는 이야기. 거칠고 웃기면서도 이상할 만큼 따뜻한 영화이다."